
기술적인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고, arm의 시작부터 미국/영국 dual listing까지의 이야기와 함께 애플, TSMC, 인텔, NVIDIA, 삼성전자와 같은 플레이어들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두루두루 알기 좋은 책이다.
투자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을 수 있지만,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이해를 키운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궁극적으로 기업 하나를 리서치하는데 있어서 산업 전반이 갖고 있는 context가 있어야 리서치도 빠르고, 투자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있어 핵심적인 정보들을 엮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 공부를 하면서 산업의 역사를 훑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리마인드하게 됐다.
쭉쭉 써내려가고 싶지만, 생각보다 글이 안써져서 인상깊었던 부분들만 부분부분…
ARM은 태초부터 자본이 부족해서 인텔처럼 사업을 할 수 없었다. 궁여지책이었을지 전략적이었을지 그 비하인드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설계도를 파는 비즈니스를 택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주어진 제약조건 하에서 최적의 결정을 한 것이다.
인텔도 마찬가지였다. 시장 지배력을 활용해서 고객들에게 꼬장을 부리는 것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적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두 회사 사이에서 애플은 그들에게 최적의 결정이었던 ARM을 택했다.
ARM이 생존하려면 에이콘과 애플이 구상한 라이선싱/로열티 모델보다 더 멀리 더 빠르게 갈 필요가 있다고 삭스비는 판단했다. 삭스비의 목표 중 저전력 ARM 칩을 세계 표준으로 만든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더 큰 영국 회사들도 적당한 목표를 내걸었던 데 비하면 비범하게도 야심찬 목표였다. 그는 또 인텔이 장악한 PC 영역에서 인텔과 다투기보다는 PC를 제외한 모든 영역을 겨냥하고자 했다. 임베디드 기기 (범용인 PC 등과 달리 게임, 통신, 이미지 처리 등 특별한 목적을 가진 기기-옮긴이)에 활용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폭넓게 통하는 장점을 지닌 표준 제품들을 개발하고, 여러 범주와 지역의 고객을찾아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가 모토롤라에서 익힌 전략이었다.
인텔이 PC 시장에서 사실상의 독점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AMD와의 전투를 비롯해 무엇을 했는지 ARM의 경영진은 충분히 경험해왔다. 인텔은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설계 지식과시장 신뢰를 결합해 ARM이 건설한 탄탄한 기반을 파괴할 수 있다고 그들은 두려워했다. 당시 ARM 이사 중 한 사람은 “아마 약 2년간 그게 우리의 주요 관심사였다”고 들려줬다. “이사회에서 우리가 그 이슈를 점검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인텔이 어디에 있지? 무엇을 취득했지?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진지하게 관심을 나타내는 고객이 있나? 인텔이 작심하고 밀어붙인다면 ARM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어요.”
잡스는 인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과 함께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정말 느리다는 것이었어요. 그들은 증기선 같아서 유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꽤 빠르게 움직이는 데 익숙해요. 둘째,우리는 그들에게 전부 가르쳐주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들이 배운 것을 우리 경쟁자들에게 팔아치울지 모른다고 걱정했기 때문이에요.”
마지막 근무일의 자책하는 인터뷰에서 오텔리니는 인텔 칩을 아이폰에 장착하지 못한 실패에 대해 말했다. “
그 기기가 어떻게 될지 당시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애플은 우리한테 지불할 가격대를 제시한 뒤 니켈 (5센트) 하나도 더 줄 수 없다고 통보했어요.” 그는 이어 “되돌아보면 그때 예측한 비용이 틀렸고 물량은 사람들 생각보다 100배로 불어났다”고 말했다. 후회스러운 어조로 그는 덧붙였다. “이로부터 교훈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관련 데이터를 활용해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내 경력에서 아주 여러 차례 나는 직감으로 결정을 내렸어요. (아이폰 건을 놓고도) 직감을 따라야 했어요. 내 직감은 ’예스’라고 말하라고 했거든요” ARM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그는 “ARM은 아키텍처를 라이선싱하는 회사”라면서 “ARM과 경쟁하기를 원했다면, 그래서 우리가 인텔 아키텍처를 원하는 누구에게나 라이선스를 주고 로열티로 돈을 벌었다면, 회사 규모가 3분의 1밖에 안 되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ARM 기술은 저렴했기 때문에 고객사들은 ARM의 대안을 생각할 이유가 없었고, ARM 설계는 계속 확산되었다.
지금와서 우리는 승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때로 돌아가면, 우리는 지금의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인텔은 모바일 시장을 잡기 위해 애플과 이야기하기 이전부터 저전력 비메모리 반도체를 준비하면서, 그들에게 설계도를 커스텀 할 수 있는 옵션을 제공하고, 생산만 담당하는 역할로 남을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래에서 인텔은 기존의 비즈니스보다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까? 넷플릭스는 DVD 매출이 90%가 넘던 시절, 일거에 정리하고 스트리밍으로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정말 정말 쉽지 않다.
ARM이 인텔을 피해다니며 애플을 만나 전 세계 모바일 시장을 장악하고, 소프트뱅크를 만나 런던과 미국에 동시에 상장하기까지의 일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순간순간 최적의 결정을 내리되 결과는 운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랜 시간 주인이 바뀌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질긴 생명줄은 숨겨진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기업은 결국 산업과 고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고, 우리가 그 때라고 불리는 순간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리면서 살아있어야 한다. 그러다 운이 때를 만나는 순간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
트럼프의 시대를 겪고 전략물자로써 반도체의 중요성을 모두가 알게 됐다. 그러나 반도체는 태동부터 전략물자 취급을 받아왔다. 플라자 합의는 여러 목적이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일본의 반도체 업체를 고사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 때도, 지금도, 반도체는 중요한 전략물자다.
TI의 전 반도체 책임자였던 월리 라인스는 “문제는 미국이 고객들이 최후로 의존하는 공급처가 된다는 것”이라고 말하며 거래제한 기업 명단의 장기적인 사용에 대해 걱정했다. 그는 “자신들의 최종 제품이 중국이나, 미국이 적국으로 지정한 다른 나라에 판매될리 없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왜 일본이나 유럽 회사가 미국 반도체 설계를 사용할까”라고 물었다. 역사는 라인스의 편이었다. 미국 상무부 기술자문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그는 냉전 시대 미국의 동맹국에 대한 판매를 제한한 1979년 <수출관리법>이 76%였던 미국 반도체 장비 기업들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10년간 45%로 낮추는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매출의 대부분은 동맹국이지만 운영에 더 개방적이던 일본에 빼앗겼다. 미국은 예비 부품과 사용 설명서에 대해서조차 승인요건을 부과했다.
칩에 대해 더 많은 통제권을 갖기로 한 결정은 아이폰에서의 타협에 대한 반성에서 촉발되었을 수 있다. 또는 아이패드에 인텔의 아톰 칩을 사용하는 것을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모바일 기기 업체는 PC 업체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는 경각심이 동기였을 수도 있다. PC 업체들은 칩 공급업체, 특히 업계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텔의 손아귀에서 고통을 겪었다. 아니면 애플이 이번에는 독자적으로 다시 시도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앞서 맥용 칩을 생산하기 위해 애플이 IBM 및 모토롤라와 맺은 동맹인 파워PC는 시작은 좋았지만 충분한 진척을 이루지 못한 채 해체되었다. 잡스는 2005년 맥의 인텔 전환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여러분을 위해 만들고 싶은 놀라운 제품을 구상할 수는 있지만, 미래의 파워PC 로드맵으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책을 읽으면서 잡스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끼게 됐다. 특히 반도체 설계를 직접 해야 한다는 그의 통찰력과 인텔 제품을 고집하던 순간에 바로 잡아줄 사람이 곁에 있었다는 부분이 매우 인상깊었다.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리더는 혼자서 역사를 써내려 갈 수는 없지만, 역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명백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서 인텔과 ARM을 놓고 벌어진 갈등을 잡스는 월터 아이작슨이 쓴 회고록에서 들려주었다. 잡스는 자신의 ’슬레이트 컴퓨터’에 인텔의 아톰 칩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엔지니어링팀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파델이 반대했다. 그는 ARM을 기초로 한 설계를 선호했는데, 그 편이 더 단순하고 더 에너지 효율이 높으며 첫 아이폰에 채택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느 날 긴장이 팽팽한 회의에서 잡스가 인텔을 믿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파델은 “틀렸고, 틀렸고, 틀렸습니다!”라고 외쳤다. 파델은 심지어 테이블에 자신의 애플 배지를 올려놓았다. 자신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을 경우 그만두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결국 애플은 아이패드를 구동하기에 아톰은 효율이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애플이 아톰을 배제한 다른 이유는 자신들의 방법으로 칩을 만들고 테스트하기를 원했던 애플에 인텔이 경직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잡스는 회고록에서 “우리는 인텔을 도우려고 했지만 그들은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다”면서 여러 해에 걸쳐 인텔칩의 그래픽 기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으나 개선되지 않았다는 예를 들었다.
잡스는 고객 경험을 최우선에 둔 뒤 그 것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역으로 생각했다. 고객은 기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걱정하지 않는 편이더 좋다는 것이 애플의 생각이었다.
잡스가 사소한 디테일에 집착한 것은 고객이 그럴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
스티브는 애플이 진정으로 독특하고 독창적인 제품을 제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리콘을 직접 소유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조니 스루지는 2016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는 그래픽 디자인 시스템의 소유를 의미했다. 이 시스템은 제조업체에 전송되는, 칩의 세부 정보가 포함된 파일을 가리킨다. 삼성전자가 다른 고객보다 애플을 우선시해 가장 작고 강력한 칩을 생산하는 최신의 공정을 제공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2012년에 출시된 A6 칩의 경우, 애플은 설계만 담당했고 삼성전자의 역할은 생산으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삼성전자가 애플의 칩을향후에도 오랫동안 만들지는 못하리라는 추측이 돌았다.
마지막은 글로 쓰기엔 뭐하지만 버리기 아까웠던 인상 깊었던 문장 하나
삭스비는 “나는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라면서 “모든 문제는 위장된 기회이다. 시도하지 않으면 배울 수도 없다”고 말하곤 했다.